독일 대통령을 지낸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는 나치 전쟁범죄를 회고하면서 '과거를 어떻게 극복하겠는가? (우리는) 단지 과거에 대해 책임을 질 뿐'이라고 단언했다. 우리는 과거에 발생한 사건을 교훈삼아 미래에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과거청산이라고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과거청산’은 불가능하다. 과거에 발생한 사건을 되돌릴 수도 없고, 피해자를 되살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과거의 사건을 현재시점에서 재구성해내고 미래에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합의하는 정도일 뿐이다.
평생 나치전쟁범죄를 연구한 게르하르트 쇤베르너는 ‘나치청산’과 ‘과거극복’(Vergangenheitsbewaeltigung) 논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 독일의 정서를 이렇게 정리했다.
“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가 주장하는 나치청산과 과거 극복은 가해자의 ‘잊힐 권리’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나치 잔혹사가 잊히고 망각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제 과거극복이 필요하다'고 주장들 하지만 실상은 전쟁범죄를 외면하려는 자기합리화이었다. 동서독 분단 이후 동독에 진주한 소련군이 나치 청산을 선결 과제로 처리했을 때, 서독에 진주한 미군주도의 연합군은 ‘반(反)볼셰비키’전선을 구축하기 위해서 과거 극복을 시도했다. 연합군이 주장한 과거 극복은 화해였다. 그 결과 나치전범들이 처벌도 받지 않고 다시 공직에 나갔고, 처벌을 하더라도 최소화하였다.”
쇤베르너는 독일인에게 필요했던 것은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주장하듯 '과거검증(Aufarbeitung der Vergangenheit)'을 통해서 무엇을 잘못했는지 복기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어떻게 하면 자신들이 인지한 잘못을 지속적으로 청산하고 교정 가능한 것은 교정할 것인가를 고민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국익’을 지키기 위한 ‘화해와 용서’라는 명분은 옳지 않았다. 과거를 사과하지 않고 '과거 청산'이라는 주장 뒤에 숨은 가해자를 피해자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겠는가? 예루살렘에 끌려가 재판을 받은 아이히만처럼 ‘악’을 위해 복무한 독일인은 과거를 복기하고 인정하길 거부했다. 쇤베르너는 피해자가 용서를 구하는 가해자를 용서할 때라야 화해가 성립된다고 봤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도 ‘과거청산’을 주장하며 가해자와 피해자가 화해한 듯한 모습이 자주 연출된다. 하지만 이러한 화해는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 상처입은 자가 어찌 상처준 자를 복기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겠는가? 용서는 피해자의 권리이지, 가해자의 권리가 아니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용서할 때까지 속죄할 수밖에 없다. 설령 피해자가 용서한다 하더라도 기억까지 지울 수는 없다. 그렇기에 바이체커는 과거는 청산할 수 없고, 다만 책임질 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입법과 사법을 통한 징벌적 청산은 가능한가? 꼭 그렇지도 않다. 법이 징벌할 수 있는 범위는 전체 사건을 재구성했을 때 극히 일부이다. 법은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부조리를 해결할 수는 없다. 또한 윤리와 도덕까지 법이 처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기가 중요하다.
얀 아스만은 과거에 발생한 사건을 ‘고통의 기억’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소통적 기억으로 보았다. 소통적 기억은 사건을 체험한 세대와 그 세대를 기억하는 후손이 입으로 전승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은 100년을 넘지 못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기억해야할 사건은 문화유산으로 남겨야 한다. 그 첫째는 사건이 발생한 장소와 유품을 전시하고 보존하는 기능적 기억이고, 둘째는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을 기록하는 기록적 기억이다. 기능적 기억은 기록적 기억과 서로 보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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